신대륙쟁탈전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4/20 [14:2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4/20 [14:27]
신대륙쟁탈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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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쟁탈전 (2)

▲ 김용일 편집위원장     ©주간시흥
1692년에서 1714년까지 계속된 ‘앤 여왕의 전쟁’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인 ‘조지왕의 전쟁’에서 유럽에서는 영국에게 이로운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프랑스에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이루어져 이 협상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아 이곳에 살고 있던 영국인들이 오히려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영국인 정착민들의 반발이 거세져 프랑스계 정착민들과 영국계 정착민들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지왕의 전쟁’ 결과 1748년부터 영국정착민들의 서부 진출이 금지 되어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서쪽으로 진출해나가자 프랑스인들이 영국인들의 서부진출을 막기 위해 오하이오 강가에 요새를 지었다. 그러자 영국 총독은 300명의 군대를 보내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군대를 지휘한 지휘관은 21살의 중령인 조지 워싱턴으로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첫 전쟁은 워싱턴을 패장으로 기록되게 하였고 이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식민지에서의 전쟁이 본국으로 옮겨져 처음에는 영국이 불리했지만 1757년 월리엄 피트가 수상이 되면서 영국은 육군과 해군을 아메리카에 집중 투입하여 승기를 잡았다. 

7년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결국 영국이 승리하여 1763년 영국과 프랑스는 ‘파리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파리조약의 결과로 프랑스는 서인도제도의 몇몇 작은 섬만 차지하고 아메리카의 모든 프랑스 소유 영토를 영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써 영국은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몰아내고 북아메리카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7년 전쟁의 막바지였던 1760년 영국에서 조지 3세가 2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지런하기는 했지만 너무 젊었고 영리하지도 못한 인물로 국제정세에도 밝지 못해 식민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오로지 복종만을 강요한데다 첫 수상으로 임명한 조지 그렌빌 또한 식민지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이 끝난 뒤 영국 정부는 무려 1억 3천만 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한해 이자만 4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당시 영국이 아메리카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비용은 한 해에 35만 파운드에 불과했지만 빚더미에 앉은 영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이어서 미국으로 하여금 주둔 비용을 내라고 했으나 미국인들은 이 비용을 낼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미국이라는 식민지는 영국 정부로서는 재정을 더욱 힘들게 하는 골칫거리였지만 식민지인지라 어쩔 수 없이 유지비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인들이 공공연히 영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밀수를 하는 바람에 영국은 화가날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미국보다 서인도제도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사탕수수가 훨씬 중요했고 미국은 서인도제도에 팔 식량을 생산하는 기지에 불과했는데 미국인들은 영국 상인들에게는 반드시 현금을 받고 식량을 팔아 이 돈으로 영국과 경쟁상대인 프랑스령 카리브섬에서 질 좋고 값이 싼 사탕수수를 사들여 주요 무역상품인 럼주를 대량생산하여 밀수출하는 바람에 영국을 격분시켰다. 7년 전쟁의 마지막해인 1763년에는 메사추세츠의 수입 사탕수수 95%를 프랑스령에서 사올 정도였다. 


1692년에서 1714년까지 계속된 ‘앤 여왕의 전쟁’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인 ‘조지왕의 전쟁’에서 유럽에서는 영국에게 이로운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프랑스에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이루어져 이 협상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아 이곳에 살고 있던 영국인들이 오히려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영국인 정착민들의 반발이 거세져 프랑스계 정착민들과 영국계 정착민들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지왕의 전쟁’ 결과 1748년부터 영국정착민들의 서부 진출이 금지 되어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서쪽으로 진출해나가자 프랑스인들이 영국인들의 서부진출을 막기 위해 오하이오 강가에 요새를 지었다. 그러자 영국 총독은 300명의 군대를 보내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군대를 지휘한 지휘관은 21살의 중령인 조지 워싱턴으로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첫 전쟁은 워싱턴을 패장으로 기록되게 하였고 이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식민지에서의 전쟁이 본국으로 옮겨져 처음에는 영국이 불리했지만 1757년 월리엄 피트가 수상이 되면서 영국은 육군과 해군을 아메리카에 집중 투입하여 승기를 잡았다. 

7년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결국 영국이 승리하여 1763년 영국과 프랑스는 ‘파리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파리조약의 결과로 프랑스는 서인도제도의 몇몇 작은 섬만 차지하고 아메리카의 모든 프랑스 소유 영토를 영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써 영국은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몰아내고 북아메리카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7년 전쟁의 막바지였던 1760년 영국에서 조지 3세가 2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지런하기는 했지만 너무 젊었고 영리하지도 못한 인물로 국제정세에도 밝지 못해 식민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오로지 복종만을 강요한데다 첫 수상으로 임명한 조지 그렌빌 또한 식민지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이 끝난 뒤 영국 정부는 무려 1억 3천만 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한해 이자만 4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 당시 영국이 아메리카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비용은 한 해에 35만 파운드에 불과했지만 빚더미에 앉은 영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이어서 미국으로 하여금 주둔 비용을 내라고 했으나 미국인들은 이 비용을 낼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미국이라는 식민지는 영국 정부로서는 재정을 더욱 힘들게 하는 골칫거리였지만 식민지인지라 어쩔 수 없이 유지비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인들이 공공연히 영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밀수를 하는 바람에 영국은 화가날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미국보다 서인도제도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사탕수수가 훨씬 중요했고 미국은 서인도제도에 팔 식량을 생산하는 기지에 불과했는데 미국인들은 영국 상인들에게는 반드시 현금을 받고 식량을 팔아 이 돈으로 영국과 경쟁상대인 프랑스령 카리브섬에서 질 좋고 값이 싼 사탕수수를 사들여 주요 무역상품인 럼주를 대량생산하여 밀수출하는 바람에 영국을 격분시켰다. 7년 전쟁의 마지막해인 1763년에는 메사추세츠의 수입 사탕수수 95%를 프랑스령에서 사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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