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나라 중에 네덜란드도 있었다. 1642년 영국은 국왕 찰스 1세가 의회와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져 내란으로 발전했고 1648년에는 의회군 지도자 크롬웰에 의해 영국 왕이 참수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혼란스러운 사정으로 인해 영국내의 상품생산이 크게 줄어 영국 상품의 가격이 오르는 바람에 경쟁관계에 있던 네덜란드의 상품 수출이 크게 늘어나 유럽과 아메리카 시장에서 영국 상품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아메리카의 시장은 물론 운송까지 장악해버려 이즈음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오자는 무역선 5척 중 4척이 네덜란드 배일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아메리카 시장을 두고 네덜란드와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어 영국의 독재자 크롬웰은 네덜란드를 꺾기 위해 “영국의 식민지로 운송되는 모든 상품은 영국의 배와 항구를 이용해야 한다.”는 항해조례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항해조례에 반대한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어 1652년에서 2년에 걸친 전쟁을 영국과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말아 아메리카에 대하나 주도권을 영국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1620년 영국에서 건너온 필그림들이 본격적으로 경작지를 개발한 이래 서쪽에는 애팔래치아 산맥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미국 동해안을 따라 영국인 거주지가 계속 확대되어 갔다. 동북부인 뉴잉글랜드 지방은 거칠고 돌투성이인 산악지방이었고 동남부의 버지니아 지방은 비옥한 평야지대였기에 자연히 남부에서는 담배 등 대규모 농업이 발달했고 북쪽인 뉴잉굴랜드 지방은 농업보다는 공업이나 어업이 주로 발달했다. 고래잡이가 시작되면서 북부의 어업과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제품의 수출도 활발해지면서 어느새 식민지인 미국과 영국의 수출, 수입의 양이 뒤바뀌고 말았다. 그러자 미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한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서의 수입을 금지하는 품목을 정하기에 이르렀고 각종 수입품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기 시작하여 영국과 식민지의 갈등이 심각해져 갔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메인에서 조지아까지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을 때 프랑스도 동부 캐나다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점차 남부 미시시피강까지 진출하자 이 세 나라 식민지 주민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영국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주도권을 잡고 나자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의 분쟁이 본격화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맞부딪힌 퀘백, 몬트리올 등의 지역은 캐나다의 주요 지리적 거점인 동시에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캐나다 어선의 주요 집결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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