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으로 모여든 사람들(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4/11 [16:1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4/11 [16:18]
신대륙으로 모여든 사람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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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식민지와는 대조적으로 북부에는 흑인들이 많지 않았다. 이는 청교도들이 노예제도를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생활조건이 더 큰 이유였다. 그들이 주로 살았던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 같은 항구도시에서는 주요 산업이 무역이나 수공업이어서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웠다.

또한 청교도들은 자녀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그들이 미국 땅을 밟은 지 불과 15년 만에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을 설립했다. 뉴잉글랜드 남쪽에서 탄생한 정착촌도 자유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만든 마을로 초기에는 이 정착촌이 모두 영국 국왕의 개인소유였기 때문에 이곳에 살려면 국왕의 이주허가증이 필요했다.

영국 제독의 아들이었던 윌리엄 펜은 아버지로부터 차용증 한 장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영국 국왕 찰스 2세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은 것으로 왕은 돈을 돌려주는 대신 북아메리카이 넓은 땅을 대신 펜에게 넘겨주었다.

1681년 펜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펜실베니아라고 이름 지었다. 그런데 그는 퀘이커 교도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종교를 믿는 신앙의 형제들에게 도피처로 이 지역을 제공했다.

 ‘퀘이커’는 원래 비하의 의미를 담은 욕설이고 그들 스스로는 ‘친구의 공동체’라고 불렀는데 퀘이커교에서는 목사나 사제가 없었고 자신의 양심만을 따르고 절대적인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주장했다.

유럽에서 종교박해가 심했던 시절 신분의 차이를 무시하고 귀족에서 거지까지 다 같은 호칭을 사용하던 이들의 행동은 박해의 사유가 되기에 충분했기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고향을 찾은 이들은 수도를 ‘형제 사랑의 도시’라는 뜻으로 ‘필라델피아’라고 불렀다.

구교도 중에서도 헨리 8세와 교황과의 알력에서 피하고자 피난처로 신세계를 찾았다. 구교도였던 볼티모어 경이 찰스 1세로부터 지금의 메릴랜드 주를 넘겨받아 영국의 구교도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의 식민지들도 종교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도 원래의 성격을 잃고 말았다. 노동력이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도시를 건설할 수가 없었기에 너도 나도 노동력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펜실베니아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를 열심히 광고를 했고 새로 정착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땅을 주겠다는 그들의 공약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본격적인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이 이주의 물결로 인해 영국인,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일랜드인 그리고 소수의 독일인과 스칸디나비아인이 신세계에 자리 잡았다.
▲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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