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으로 모여든 사람들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3/31 [11:1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3/31 [11:17]
신대륙으로 모여든 사람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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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필그림이 플리머스에 첫발을 내디딘 1620년 이후 1732년까지 100여 년 동안 영국인들은 동부해안을 따라 정착지를 계속 확대해갔고 그들이 세운 중요 정착지는 주로 청교도들이 세운 것으로 이들은 영국 성공회를 거부하고는 있었지만 겉으로는 영국에 충성하는 척 하며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후로 이곳 신대륙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체로 지긋지긋한 가난에 지쳐 풍요로운 삶을 꿈꾸던 사람들로 그들은 먼저 아메리카에 건너간 친척이나 친구들의 부름을 받고 뒤따라 건너갔는데 신대륙에서 보내온 편지와 여비는 그들에게 엄청난 성공으로 비쳐졌다.

다른 이유로는 종교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 정치적으로 핍박받던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으며 또한 신대륙에서 돈을 벌어 잘 살아보려는 상인들로 이들은 이민 온 사람들을 일손이 필요한 곳에 알선해주기도 하고 선박회사나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돈을 긁어모으게 위해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았다. 

또한 영국 사회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사람들 즉 빈민이나 죄수를 경우에 따라 강제로 보내기도 했고 납치되어 온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타고 왔던 배삯을 물기 위해 4내지 7년 동안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이 있었다. 인디언 원주민들은 자존심도 강하고 부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노동력 착취를 위해 흑인들은 마구 끌고 왔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흑인들도 백인 이주민들과 같이 강제노역자로 취급하여 7년이 지나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져 결국 대를 이어 세습되는 노예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영국에서 건너오는 노동자들이 줄어든 몫을 메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75년에는 북아프리카 노예수가 5,000여 명에 이르렀고 높은 이윤을 남겨주는 노예에 많은 선주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부 식민지의 소규모 농장주들은 노예를 거느린 경우가 극히 드물었지만 남부 버지니아나 캐롤라이나 같은 대규모 농장주들은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노예를 부리며 이들이 벌어준 돈으로 으리으리한 별장에 영국에서 수입한 각종 호화 사치품으로 치장한 신생귀족 계급이 탄생하였다.

이처럼 아메리카에 건너온 사람들은 주로 유럽의 하층민이거나 낡은 유럽 체제에 반대하여 자유로운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들이었기에 모험과 개척, 그리고 투쟁정신이 투철한 거칠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임자가 없는 빈 땅에 건너와 정착한 사람들로 그들을 지배할 정부, 즉 국가가 없었기에 아메리카는 국민이 먼저, 국가가 나중에 생긴 거꾸로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그런 만큼 아메리카 국민들의 주인의식은 어느나라 국민들보다 투철한 드센 국민들의 나라였기에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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