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데시아스 조약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3/22 [13:50]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3/22 [13:50]
토르데시아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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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이탈리아 출신의 사업가이자 선원이었던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보다 7년쯤 늦게 신대륙으로 갔지만 한 동행자가 기행문에서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노라고 칭송했는데 세계지도를 수정하고 있던 독일의 젊은 지도제작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이 책을 읽고 책 내용에 감명을 받아 신대륙에 아메리카라고 써넣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대륙은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하여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포르투갈에 큰 충격을 주어 아프리카마저 스페인이 진출할까 두려워했고 스페인은 스페인대로 포르투갈이 아메리카에 진출할까 두려워 두 나라는 1494년 교황 알렉산드로 6세에게 중재를 부탁하여 대서양에 세로로 선을 그어 이 선의 서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스페인이 동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포르투갈이 갖도록 하는 토르데시아스 조약에 성립되었다. 이 토르데시아스 선이 오늘날의 브라질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고 브라질 왼쪽에 위치한 나라들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스페인은 멕시코, 카리브해, 중앙아메리카, 페루를 비롯해 아메리카의 플로리다에서 텍사스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미국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콜럼버스를 홀대한 것이 엄청난 실수였는지 알아차린 포르투갈은 뒤늦게나마 브라질 해인에 자리를 잡았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불과 몇백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아스텍 왕국을 점령했으며 그로부터 12년 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에서 잉카제국을 정복하여 파괴했다. 이들 정복자는 기독교도로서 이교도를 개종시키고 진실한 믿음을 퍼뜨리는 것이 신이 내린 임무라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정복행위가 정당하다고 믿었다.

아스텍과 잉카의 사원, 그리고 궁전에서 엄청난 보물들을 훔쳤지만 스페인인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1513년 부활절에 후안 폰세 데 레온은 멕시코만의 북쪽 해안에 도착했고 꽃피는 부활절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파스쿠아 플로리다’에서 착안하여 그 지역 전체를 플로리다라고 이름지었다.

에르난도 데 소토는 스페인 국왕의 허락을 받아 1539년에는 650명의 군인과 220필의 말을 이끌고 원주민들을 약탈하고 살인하며 미시시피까지 진출했다. 이 지역은 비록 비옥한 땅이었지만 정복자의 꿈은 땅이 아니었기에 4년간의 탐험 끝에 황야에서 생을 마감했다. 1565년에 스페인 사람들은 오늘날의 미국 땅에 최초로 플로리다의 세인트오거스틴에 유럽인 정착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정복자들의 거듭된 실패로 미국땅 북부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져갔고 정착촌도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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