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2/01 [17:2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2/01 [17:26]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의 콜럼버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인도로 가는 길만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1451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스페인인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스페인계 유대인인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어렸을 때부터 선원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독학으로 항해술과 라틴어를 익혔으며 특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파울로 달포초 토스카넬리의 열광적인 지지자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동양으로 가는 편리한 항로를 찾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향신료나 비단처럼 유럽인들이 갈망하던 동양의 값비싼 사치품이 멀고 험한 육로로 운반되던 시절이어서 항로만 찾는다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의 포루투갈은 최강의 해운국이었고 아프리카까지 거점을 두고 있을만큼 해운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콜럼버스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스페인의 국왕 페르난도 2세와 왕비 이사벨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산타페 협약이 1492년 4월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콜럼버스는 세습권으로 제독의 지위를 획득하는 한편 종신직으로 부왕의 직위에 버금가는 총독의 지위를 약속 받았으며 또한 새로 발견된 지역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이익의 10%를 취득하고 앞으로 교역활동에 대해 최고 8분의1의 자본참가권을 승인 받았다. 드디어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세척의 배인 ‘산타 마리아’, ‘핀타’, ‘니냐’를 이끌고 미지의 세계로 출발하여 서쪽으로 거의 두 달을 항해한 끝에 1492년 12월 마침내 육지를 발견했다.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라고 불렀던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 섬이었다.

톨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한 부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제자)’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곳의 원주민들을 '인디오‘라고 부르며 황금과 향료가 나는 땅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아이티 섬)까지 항해했다. 하지만 1492년 크리스마스 밤 산타마리아호가 좌초하여 난파했기 때문에 급히 나비다에 거류구를 설치하여 약 40여 명의 인원을 잔류시킨 뒤 귀환길에 올라 1493년 3월 15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완전한 성공이라 판단된 첫 번째 항해 덕분에 1493년 9월 25일 출발한 2차 항해 때는 17척의 배에 1,500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경쟁적으로 승선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희망과 기대는 실망과 불만으로 바뀌었다.

금광채굴을 위해 동원되었던 원주민들의 반란이 이어지자 콜럼버스는 반란이 일으킨 원주민들을 노예로 본국에 송환했으나 이사벨 여왕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이같은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1498년 5월 30일 세 번째 항해에서 향료가 나는 섬을 찾고자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콜럼버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일파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의 통치능력을 의심한 본국에서 온 사찰관에 의해 족쇄가 채워져 송환되는 바람에 그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