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세자 양녕대군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12/02 [15:00]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12/02 [15:00]
비운의 세자 양녕대군 (2)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세자의 기행은 신하인 곽선의 첩어리에게 빠지면서 극에 달했다. 신하의 첩을 뺏은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출생하게 한 것이었다.

이를 안 태종이 노발대발하여 어리를 쫓아냈지만 어리를 잊지 못한 세자는 그의 장인인 김한로에게 부탁하여 몰래 어리를 궁으로 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일이 태종에게 발각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태종은 김한로가 세자에게 아부하면서 권세를 휘두르려한다고 의심했다. 세자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할 장인으로서 세자가 하자는 대로 한 것은 크나큰 불충이라고 몰아붙여 결국 김한로를 유배시키고 세자는 궁 밖으로 나가 근신하도록 했다.

그런데 근신해야할 세자가 궁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어리를 찾아가자 태종은 이는 세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세자를 폐할 뜻을 내비치자 대부분의 신하들이 찬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양녕을 폐한 뒤 누구를 세자로 내세울 것 인가였다. 양녕에게는 이미 5세와 3세에 이른 두 아들이 있었기에 일부 신하들은 양녕의 큰 아들로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했고 일부는 양녕의 형제들 중에 어진 사람으로 세자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태종도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충녕이 왕조를 안정시키는데 적합한 인물이라는 판단으로 충녕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 충녕이 세종대왕으로 세종에 의해 조선왕조는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같은 조치는 결과적으로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있다.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지명한 뒤 5일 만에 옥새를 넘겨주었고 7일후에는 아예 전위를 해버렸다.
세종에게 전위한 이유로는 “세상일을 잊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 목적은 후계구도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충녕을 세자로 지명했을 때에는 14년간이나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의 지지 세력이 여전히 강력했고 무엇보다도 양녕을 편애했던 태종의 부인 민비가 문제로 만약 태종이 민비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면 기가 센 민비가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럴 경우 충녕이 어머니 민비를 대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미리 전위하여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던 것이기에 서둘러 전위를 한 것이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