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세자 양녕대군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11/23 [13:5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11/23 [13:57]
비운의 세자 양녕대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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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왕권강화에 성공한 태종의 다음 과제는 후계자를 확실하게 세우는 일이었다. 아버지 태조 때의 일에서 보듯이 세자를 잘못 세우기라도 하면 골육상쟁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선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은 적장자를 세자로 세우지 않은데 있다고 판단한 태종은 1404년(태종 4)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양녕을 얻기 전 태종과 민씨 부인은 3명의 아들을 보았으나 모두 병으로 요절하자 태종은 양녕대군이 태어나자 또 잃을까 두려워 처가에서 키우도록 하여 양녕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게 되었다. 양녕대군은 세자에 책봉된 후 태종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기행을 일삼아 물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세자의 파행은 주위사람들의 죽음을 몰고 왔다.
 
 그와 가까이 하던 사람들이 세자를 대신해 귀양을 가거나 죽고 말았다. 이러한 세자의 파행은 외척의 득세를 염려하던 태종의 우려를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특히 기가 센 부인과 기세등등한 처남들이 어린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태종을 괴롭혔다.

이런 와중에 태종이 병이 들어 세자에게 양위한다는 명을 내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명에 대해 민씨 형제들이 환영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이를 트집 잡아 처남인 민무구과 민무질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드러누웠고 왕후의 동생들이 병문안 차 대궐에 들어왔다가 세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세자는 외숙부인 민무구과 민무질이 잘못했다고 나무랐다. 이는 외숙부가 쓸데없이 나서는 바람에 화를 자초했다는 질책이었다.

이후 세자는 궁 밖의 수많은 여자들과 어울려 놀면서 비행을 일삼았고 태종에게 들켜서 반성문을 쓰고 잘못을 비는 일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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