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이성계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8/24 [12:04]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8/24 [12:04]
정도전과 이성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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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고려말의 혼란한 국내외 정세는 무예가 탁월한 무장을 필요로 하였고 그런 면에서 이성계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무인으로 동북 면에서 세력을 확고히 하던 전주이씨 일족 중에서도 이성계의 무예실력은 탁월하여 이런 능력을 기반으로 북쪽의 홍건적을 몰아내고 남쪽의 왜구를 몰아내는 등 무장으로서의 주가를 높여갔다.

고려 제일의 무장으로 인정받은 이성계는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중앙장계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군사력을 갖춘 신흥무장 이성계에게 많은 유교지식인들이 몰려들었고 그중에 정도전이라는 인물과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폐위된 우왕의 뒤를 이을 왕을 놓고 대립하여 결국 조민수가 주장한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우는 바람에 이성계 일파가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와 결탁하여 창왕을 폐위시키고 신종의 7세손이 공양왕으로 봉해졌다.

신진유학세력인 이성계 일파는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유교중심의 개혁작업을 시도했다. 신진세력들의 개혁정책은 가속화되었지만 남은, 조준 정도전 등 급진세력들은 이에 만족할 수 없었다. 유교적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면 고려왕조가 큰 걸림돌이 되기에 그들은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철저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꿈이었다. 특히 신분상의 제약이 있는 정도전으로서는 새로운 나라건설만이 지긋지긋한 신분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기에 새나라 건설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등 언건개혁파의 생각은 달라서 그들은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여 사회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급진파와 온건파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려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등청하지 못한 틈을 이용하여 정몽주가 급진파를 대거 유배시켰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들 온건파의 실력행사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수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하고 말았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다시 이성계파가 득세하였고 정도전이 복귀하면서 역성혁명은 구체회되어 대비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받아내어 공양왕은 폐위되고 이성계가 고려국왕에 올랐으며 이듬해 조선이라는 국호로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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