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5)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7/10 [21:00]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7/10 [21:00]
삼별초의 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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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삼별초의 근거지는 강화도였기에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화도를 고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귀국한 원종이 개경환도를 추진하면서 삼별초의 명부를 빼앗아 병권을 장악하려하자 이들은 반발 할 수밖에 없었다.

삼별초 명부가 넘어갔다는 것은 몽고군의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른다는 의미여서 고려의 최정예 군사력을 가진 삼별초로서는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270년 6월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를 이끌고 있던 노영희의 지휘아래 반란을 일으키고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같은 삼별초의 반란은 반몽감정이 깊어진 고려 하층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강화도는 육지와 너무 가까워 몽고군의 반격이 두려운 나머지 강화도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진도로 진영을 옮기기로 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던 귀족들을 모두 진도로 옮겼다.
삼별초가 근거지를 진도로 옮기자 고려 정부는 당황했다. 몽고군은 본래 해전에 약했고 고려 정부군은 삼별초에 대항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는 순식간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곧 전라도 일대를 제압했다. 삼별초의 위세가 이처럼 강해지자 조정은 1270년 9월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하여 몽고의 원수 아해와 함께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여몽연합군과 삼별초와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연합군은 군사력으로 삼별초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지만 그때마다 취약한 해군력으로 인해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1271년 고려인으로 몽고에서 권력을 행세하고 있던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정부군과 함께 진도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자 견디다 못한 삼별초군에서 배중손이 사망하고 승화후 왕온이 홍다구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삼별초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 후 김통정이 잔여 삼별초를 규합하여 제주도에 본부를 설치하고 다시금 반격작전을 감행하여 제해권을 되찾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자 여몽연합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하여 1273년 2월 함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연합군의 이같은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삼별초는 계속 후퇴하다가 뿔뿔이 흩어졌고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이 그해 4월에 전사했으며 잔여 삼별초군 1천3백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로써 삼별초의 난은 3년 만에 완전히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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