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7/06 [11:2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7/06 [11:26]
삼별초의 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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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야별초에서 유래되었다. 별초(別抄)란 임시적으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으로 1219년 최우가 권력보호를 위해 야별초라는 사병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뒤 군사가 많아지자 좌,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고의 고려 침입 때 몽고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을 모아 신의군이 만들어져 합쳐서 삼별초라 부른다.

원종의 친조 이후 원의 고려에 대한 경계심이 대폭완화 되었다. 이즈음 원은 일본이 자신들에게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고려가 일본을 설득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원에 대해 조공할 것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은 1268년 고려에 송나라 정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원은 김준 부자 및 아우 김충으로 하여금 원병을 이끌고 연도로 올 것을 요청했지만 김준은 원에 가면 권좌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생각에 원나라 사신을 죽이고 섬으로 들어가 항전할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원종이 김준의 의견을 강력하게 반대하자 고민에 빠진 김준에게 장군 차송우는 원종을 폐위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엄수안이 반대하여 원종폐위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원종과 김준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그 후로 김준은 몽고의 사신을 영접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사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기 까지 하여 화가 극도로 난 원종은 1268년 12월 임연을 시켜 김준과 그의 아우인 김충을 살해하고 말았다.

김준세력을 제거한 원종은 개경환도를 서두르며 친몽정책에 박차를 가했지만 무신정권을 이끌던 임연은 원종의 이같은 정책에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시키기로 결정하여 원종의 병이 위독하여 안경공 창에게 선위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원나라에 보내고 1269년 6월 22일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태자 심은 원종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길에 올라 개경 근처에 왔을때 임연이 원종을 폐위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자의 요청을 받은 쿠빌라이는 즉시 사신을 보내 국왕의 폐립사건에 대해 추궁했으나 임연은 원종이 병으로 선위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원나라는 병부시랑을 파견하여 원종과 안경공 창, 그리고 임연을 연경으로 호출하자 임연은 할수 없이 1269년 11월 원종의 왕위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며칠 뒤 원종은 안경공 창과 함께 몽고로 떠나고 임연은 몽고측의 추궁이 두려운 나머지 병을 핑계삼아 자신의 아들 임유간과 심복을 보냈다.

쿠빌라이에게 간 임유간은 원종 폐립문제를 추궁받자 다른사람의 탓으로 돌렸다. 이에 격분한 쿠빌라이는 임유간을 가두고 임연을 다시 호출했다. 하지만 임연은 몽고의 호출을 거부하고 야별초로 하여금 백성들을 섬으로 이주하도록 하여 몽고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임연은 울화증을 견디지 못하고 1270년 2월 등창으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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