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6/29 [13:02]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6/29 [13:02]
삼별초의 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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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은 고종의 맏아들로 1219년 3월에 태어나 1241년 정월 태자에 책봉되어 1259년 4월 몽고와의 화의조약에 따라 고종을 대신하여 몽고에 입조했다. 원종이 몽고를 방문 했을 때 몽고는 헌종의 죽음으로 쿠빌라이와 아리패가 왕위를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헌종의 아우인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쿠빌라이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그를 일국의 왕으로 대접했다. 이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몽고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을 했는데도 오직 고려만이 30년을 항전하며 항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특별대우였다.

쿠빌라이는 원종이 자신을 찾아오자 당나라조차도 정복하지 못한 고려의 태자가 자기를 따르게 되었다며 매우 기뻐해 후에 자신의 딸과 원종의 태자 심을 결혼시켜 원종과 사돈을 맺게 된다.

또한 쿠빌라이가 고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하 속리대로 하여금 원종을 호위하게 하자 이런 쿠빌라이의 호의적인 태도에 원종은 그 후부터 친몽적 성향을 띄게 된다.

원종이 몽고에 있을 때 고종이 죽자 실권자 김준은 고종의 둘째아들인 안경공 창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조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원종은 몽고측의 출륙환도(육지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오는 것) 요구와 무신들의 강화도 고수 주장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내심 몽고의 힘을 이용하여 무신들에게 뺏긴 정권을 회수하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몽고의 요구에 따라 우선적으로 출륙환도를 단행하고 다음에 독자적인 힘을 키워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무신들의 강력한 반발로 한동안 실행되지 못했다.

이 당시 새로운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김준으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왕은 형식적으로는 정권을 되찾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힘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강화도에 도착한 원종은 정사는 뒷전으로 미루고 궁녀들과 음란한 행각을 벌이며 방탕을 일삼았다. 그러면서 몽고와의 유대관계 강화에 주력하며 무신정권을 몰아내고 동시에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원종은 친몽정책의 일환으로 1261년 태자를 원에 보내 쿠빌라이가 아리패가를 평정한 것을 축하했으며 1264년에는 원으로부터 왕의 친조요구가 있자 그해 8월에 북경으로 떠나 9월에 도착하여 10월까지 머무르다 도착하기도 했다. 왕이 나라를 떠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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