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6/22 [12:4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6/22 [12:47]
삼별초의 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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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이 죽고 태종 오고타이가 즉위한 후 1231년 몽고는 저고여 일행을 살해한데 대한 문책을 한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략했다. 몽고 침략군 사령관은 살리타이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고려의 장군 홍복원을 길잡이로하여 쳐들어왔다.

고려군은 결사적으로 분전했으나 압도적인 몽고군을 당할 수 없어 원나라에 화의를 요청했다. 이 화의에 따라 몽고는 72명의 ‘다루가치’를 두었다. ‘다루’란 진압한다는 몽고말이며 ‘가치’는 그것을 실행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다루가치란 몽고홍제를 대신하여 고려를 다스리는 대행관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그것도 자그마치 72명이나 두었다는 것은 이미 종주국이나 속국의 관계를 떠나 직접통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루가치의 횡포는 극심해서 탄원하는 사신을 보내도 억류한 채 돌려보내지 않기 일쑤였기에 견디다 못한 고려는 몽고에 대한 결사항전의 결의를 굳히고 강화도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초원에서는 무적의 몽고군이었지만 해전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30년에 걸친 대 몽고 항전이 시작되었다.

강화도 천도는 당시 고려의 권신 최우의 의견에 따라 강행되었는데 이 무렵의 고려는 무신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대여서 고려의 강화도 천도는 몽고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어 고려는 거듭되는 몽고의 침공에 본토를 내준 꼴이 되었다.
몽고군의 침입에 국토는 유린되었으며 백성들은 약탈을 당했을 뿐만아니라 수없이 죽어갔다. 저항하는 적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탄압하는 것이 몽고의 철칙이었다.

태종 오고타이가 죽은 후 황후의 섭정기간 5년(1241-1246)과 정종이 죽은 1248년 후 3년간 그리고 몽고의 황위계승 분쟁 때만은 몽고의 침공을 받지 않았지만 그런 문제들이 수습되면 고려는 다시 몽고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특히 1254년에서 그 이듬해에 걸친 몽고군의 침공 때에는 비참함이 극에 달했다. 몽고의 요구조건은 단절시킨 공물을 다시 바칠 것과 국왕이 강화도에서 나올 것, 그리고 국왕 또는 태자의 입조 세 가지였다.

그러던 중 강화도에서 쿠테타가 일어나 최씨정권이 무너지자 고려 고종 46년(1250) 태자의 입조가 실현되어 전쟁이 중지되었다. 고려 태자가 만나기로 되어 있던 몽고황제 헌종은 당시에 송나라 정벌군을 이끌고 사천에 출정중이어서 사천으로 가던 중 헌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다가 북으로 회군하고 있던 쿠빌라이와 만나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뜻밖의 만남에 놀라며 기뻐했으며 쿠빌라이와 고려태자와의 만남은 몽고와 고려와의 관계계선의 계기가 되었다.
몽고의 고려에 대한 공물의 요구는 가혹한데가 있어 쿠빌라이는 몽고군을 철수시키고 대행관 다루가치 제도도 폐지 시켰으며 고려의 의관풍습도 몽고의 풍습을 따르지 않아도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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