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의 난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6/02 [10:1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6/02 [10:16]
정중부의 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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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1170년 8월 29일 이날도 의종은 화평재로 나가 연회를 베풀고 문관들과 어울려 떠들고 놀았다. 그러나 호위병들은 굶주린채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좌승선 임종식, 기거주 한뢰, 이복기 등의 문인들이 왕의 총애를 믿고 무관들에게 무례하게 굴어 병사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거사를 도모할 것을 요청하자 정중부는 “지금이 거사할 기회이지만 왕이 여기를 떠나 환궁하면 다음으로 미루기로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행에 옮기자”고 말했다.

이런 다짐을 한 다음에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의종은 환궁하지 않고 보현원으로 가서 연회를 계속하고자 했다. 의종은 보현원으로 가기전 오문에서 문신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깨가 축처진 호위병들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사기가 저하된 무관들을 위로하고자 수박희 시합을 시켰다.

수박희가 시작되자 대장군 이소웅과 장교하나가 시합을 벌였는데 이소웅은 무인이기는하나 힘이 약한 탓에 수밧희 도중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것을 본 환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 도망가는 이소웅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이소웅은 아래로 떨어졌고 이를 본 왕과 주변 문인들은 손뼉을 치며 이소웅을 비웃었다.

이를 보다 못한 정중부가 나서 한뢰에게 야단을 치자 의종이 정중부를 달랬다. 이때 이고가 칼을 뽑고 정중부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정중부는 때가 아니라며 이를 말렸다.

그러나 황혼이 깃들무렵 의종의 행렬이 보현원에 이르자 이고와 이의방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우선 왕명이라고 속여 군사들을 한군데 모은 다음 왕과 문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틈을 타 임종식과 이복기를 칼로 쳐죽이자 이 광경을 목격한 한뢰가 왕옆으로 피신했다. 그러자 의종은 환관들로 하여금 이고와 이의방을 저지하도록 했다.

이에 정중부는 한뢰를 죽이라고 명령하며 한뢰를 내줄것을 청원하였지만 환뢰가 왕에게 매달려 나오지 않다가 이고가 칼을 들고 위협하자 밖으로 나왔다가 이고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를 본 문관들이 무관들을 꾸짖자 이고 등은 환관과 내시, 그리고 주위에 있던 문관들을 살육했다. 이런 상황에서 병사하나가 달려와 정중부에게 김돈중이 도망갔다는 보고를 하자 급히 김돈중의 집으로 수하를 보내 그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거사에 성공했다고 기뻐했다.

그들은 곧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달려가 별감 김수장을 죽이고 수십명의 궁궐 관원들을 살해한 다음 50여 명의 고급관료들을 살해했다. 이를 목격한 의종은 정중부에게 살인행각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지만 정중부는 시간을 끌며 왕명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 일행은 환관 왕광취, 백자단, 내관 영의, 유방 등을 죽여 저자에 효수하고 의종의 사저인 관북택, 천동택, 곽정동택의 재산을 털어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며칠후 정중부는 의종을 폐하고 의종의 아우인 악양공 호를 왕으로 내세웠다.

다소 우발적인 사건으로 근왕병들이 일으킨 정중부의 난은 결국 문신귀족들을 대량 참살하고 급기야 왕을 교체하여 무신시대를 열게 되어 고려사회는 새로운 변혁기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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