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4/27 [15:1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4/27 [15:15]
묘청의 난 (2)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등과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자신이 왕이라 칭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 반란이 왕을 교체하기 위한 역모가 아니라 개경세력을 제거하고 인종으로 하여금 서경천도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란군은 난을 일으킨 후 국왕의 조서를 날조하여 서경 부유수 최자, 감군사 이총림, 어사 안지종 등을 잡아 가두고 서북면 병마사 이중병과 그의 수하 장수들, 그리고 각 성의 지휘관들을 포박하여 모구 서경의 소금창고에 가두었고 또한 서경에 머물고 있던 개경출신들을 모두 가두고 군사를 자비령으로 파견하여 개경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고 서북면내에 있는 모든 군대를 서경에 집결시켰다.
 
서경의 변란 소식을 접한 인종은 백관을 소집하여 회의 끝에 반란군을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김부식을 원수로 임명하고 내시들을 서경으로 급파하여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서경군은 왕에게 서경으로 이어할 것을 청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변고를 당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인종에게 올렸다.
 
개경의 대신들은 신하로써 왕을 감히 오라고 하는 것은 불충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개경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인종은 할 수 없이 출병을 명령했다. 그러자 김부식은 우선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인물들을 처단한 후 대병력을 이끌고 서경으로 향했다.

김부식의 대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군이 안북대도호부(안주)에 도착하면서 반란군 지역에 있던 많은 성들이 정부군에 호응하는 바람에 전세는 점차 반란군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김부식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반란군을 이끌고 있던 조광에게 누차에 걸쳐 항복을 권유했다.

전세의 불리함을 절감한 조광은 항복을 결심하고 묘청 등의 목을 베어 윤첨을 시켜 개경으로 보냈다. 그런데 개경에 도착한 윤첨이 옥에 갇히자 조광은 항복을 해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결사항전을 명령했다. 그리고 개경측의 회유교섭도 단호히 거절하고 정부측이 보낸 사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전면전을 선언한 조광은 정부군의 총공세에 대비하여 대동강을 따라 1,170칸에 달하는 성을 쌓아 방비를 견고히 했다. 그러던 중 정부군의 장수인 이녹천이 공을 세우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공격하자 반군은 10여 척의 작은 배에 나무를 싣고 불을 질러 정부군 병선이 있는 곳으로 흘려보냈다. 불붙은 작은 배가 병선에 다가가자 정부군은 대혼란을 일으켜 이 전투에서 이녹천은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정부군은 무참히 패배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광은 승리에 빠져 정부군을 깔보기 시작했다.

김부식은 서경성에 대한 정면공격은 지세가 험한데다 적군의 세력이 강하여 무리라고 판단하여 서경성 전체를 포위하고 지구전으로 나가 성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반군의 사기가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 개경의 조정중신들은 이런 김부식의 작전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를 소환하고 다른 장수를 보내야 한다고 했으나 인종은 김부식을 끝까지 믿기로 했다.

서경공략은 거의 1년이 걸렸다. 성이 포위되자 식량이 고갈되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여 사기가 꺾인 틈을 타 김부식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미 사기가 저하된 반란군이었기에 서경성은 쉽게 함락되었다. 조광의 명분 없는 버티기가 있었지만 결국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휘관들이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묘청의 난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