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4/20 [21:4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4/20 [21:49]
묘청의 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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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즉위 초부터 이자겸 세력에 의한 한안인 일파의 축출 사건으로 피비린내를 풍겼고 이자겸의 난을 겪으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인종은 개경의 지력에 다했다는 풍설에 따라 서경 천도에 귀를 기울인다.

서경을 일찍이 정치적,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태조 때부터 중시했던 곳으로 훈요십조를 통해 서경의 군사적, 정치적으로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이를 중시하라는 유훈을 남긴 곳으로 서경은 개경의 왕실이 미약하거나 위협받을 때 이를 보호하고 위협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서경 즉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황폐화 되었지만 고려 태조인 왕건이 이름을 서경으로 고치고 양가의 자제를 이주하게 하여 새로이 관부를 설치했으며 도성을 수축하고 학교를 창설하는 등 수도인 개경 못지않게 훌륭한 도시로 만들어 장차 천도하려는 계획까지 세운 곳이었다.

인종이 서경천도론에 귀를 기울인 근본적인 원인은 개경세력에 대한 불신으로 이자겸의 난 때 보여준 개경 귀족세력들의 방관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승려 묘청을 앞세운 서경천도론이 제기되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민심마저 흉흉해져 있었기 때문에 인종이 서경천도론에 귀를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고려왕조를 지탱하는 한 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토대로 왕실 사람들을 호위했던 서경 사람들은 개경의 조정, 중앙정치에 많이 참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차별받고 있다는 불만이 매우 많았다. 이는 소외감을 불러 일으켰고 동시에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불만을 해결할 구세주로 묘청이 등장했다. 그는 이제부터 서경이 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서경천도를 주장함으로써 서경 사람들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묘청의 주장을 받아들인 인종이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1127년부터 자주 서경으로 거동하였고 서경에 대화궁을 짓도록 명령하자 서경천도는 구체화되기 시작했지만 거센 반대파의 입김에 밀려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묘청을 반대하는 김부식 등 유학자들이 대대적인 서경천도 반대 운동을 펼쳤고 대화궁 준공 직후에 벼락으로 파손되는 일이 발생하고 인종의 서경 행차 도중에 폭풍우가 몰아쳐 인마가 살상되는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자 서경천도론이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묘청도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완급을 조절하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시간을 벌려고 했다.

이때부터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천도 세력들은 개경세력을 너무 자극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인종의 신뢰를 회복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서경천도는 아니더라도 상징적이나마 이를 표시하는 방책으로 대화궁에 인종이 거처하지 않더라도 신하의 예의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어좌를 설치하여 어의를 두고 공경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경의 귀족세력과 인종의 눈에 벗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중 1135년(인종 13) 정월 묘청 등은 갑자기 일방적으로 개경의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으로 정하고 서경에 있던 개경인물들을 숙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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