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 (2)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9/04/05 [16:05]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9/04/05 [16:05]
이자겸의 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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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신문
최승로가 활약하던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여전히 개국공신들이 활약하고 있었으나 점점 그 세력에 약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어서 <시무28조>를 통해 개국공신들의 후손을 등용하라고 했으나 세월이 점차 흘러가면서 개국공신들은 하나 둘 사라져가고 고려 중기에 들어서는 그 자리를 외척세력들이 차지하고 말았다.

최승로는 고려를 지배하는 국가이념이 불교가 아니라 유교가 되도록 힘씀으로 유교사상에 의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점점 왕권이 약화되고 나이가 어린 왕이 등극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실권은 서서히 외척세력들에게 넘어가다 인종 때에 이르러 외척세력의 발로가 극에 이르렀다.

인종은 예종의 장남이고 이자겸의 둘째딸인 순덕왕후 이씨의 소생으로 1115년 2월 7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122년 4월 예종이 죽자 14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7대 왕에 올랐다.

인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 조정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과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관료세력이 서로 정권을 다투고 있었는데 예종 때는 왕이 중립을 잘 지켜서 서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나이어린 인종이 즉위하면서 그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이자겸 쪽으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에 한안인은 이자겸의 권력독점을 비방하고 측근세력을 모아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다 이자겸에게 역모로 몰려 숙청당하고 말았다. 한안인파를 제거한 이자겸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자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어 인종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절대 권력을 얻은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딸과 넷째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내 결과적으로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 겸 장인이 되어 더욱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하게 되어 왕권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에게 왕권을 완전히 장악당한 인종은 측근들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무장들에게 거사를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무장들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와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신과 그의 아들인 척순을 죽이고 시체를 궁성 밖으로 내던졌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척준경은 군사를 이끌고 궁성을 포위하여 왕의 군사들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왕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수부족으로 수세에 몰리자 인종은 근신 10여명과 함께 궁궐을 버리고 피신하였다. 패배한 인종은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겨줄 의사를 비쳤으나 조정중신들의 극렬한 반대를 의식한 이자겸이 선뜻 나서지 못하여 가까스로 왕위를 넘겨주는 사태는 모면했다.

그러나 이일을 계기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나섰던 무장들은 살해되었고 왕의 근신들은 모두 유배되었으며 인종마저 사저에 연금당하고 말았다. 연금당하고 있던 인종은 왕권을 회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중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노려 척준경에게 이자겸을 척결하도록 명령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왕비로 있던 이자겸의 두 딸도 폐출시킴으로 이자겸의 난은 종결되었다. 난이 종결되자 중신들은 이자겸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인종은 자신의 장인인 점을 들어 유배시키는데 그쳤다. 그리고 이자겸을 제거한 척준경에게 공신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조정을 수습한 인종은 이듬해인 1127년 3월 척준경을 유배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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