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조약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8/23 [15:34]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8/23 [15:34]
천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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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 용 일
1858년 제2차 아편전쟁은 천진조약으로 마감되었다. 1년 후인 1859년 6월 17일 영불 연합함대는 지난해에 맺은 천진조약의 비준을 위해 천진으로부터 50킬로미터 떨어진 백하에 도달해 백하 어귀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남의 나라 영토에 있는 장애물을 허가 없이 제거한 것은 분명 침범으로 도발을 자행한 것이었다. 이 영불 연합함대에 대해 청국군은 포격을 시작했다. 이 포격전은 일주일간이나 계속되어 영국함대의 참패로 끝이 났다.
 
영국군함은 4척이 격침되고 2척이 나포되었으며 사상자의 수가 500여명에 이르렀고 제독 호프 대장도 중상을 입었다. 영국함대는 항행불능이 된 군함과 총포 탄약을 유기하고 상해로 도망쳤다. 영불 양국은 이듬해인 1860년 영국은 군함 173척 병력 1만8천여 명, 프랑스는 군함 33척 병력 6천3백 명을 동원하여 다시 백하 어귀에 도달했다. 지난 날 아편전쟁의 최고 책임자였던 퍼머스틴은 총리가 되어 있었는데 그는 의회에서 “북경을 공격 점령하여 청국황제를 몰아내고 유리의 전권대사를 그곳에 주재시켜야 한다.”라고 감정적인 연설을 했다.

영불 연합군은 4월에 주산열도를 점령하고 6월말에 상해에 도착한 후 북상을 계속하여 8월1일 북당에 상륙했다. 청국은 북경 가까이에 있는 천진을 지킬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통주까지 후퇴시켰다. 무주공산이 된 천진은 영불연합군의 군정하에 놓이게 되고 파크스가 민정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즈음의 청국은 태평천국과의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계신 북경주변에 전쟁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불이 제시한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영불의 대표인 파크스가 삼궤구고두의 예를 거부해 교섭이 결렬되자 함풍제는 동생인 공친왕에게 뒷일을 맡기고 재빨리 열하로 도망쳤다.

영불연합군은 북경에 진입해 10월 6일부터 9일까지 원명원을 철저히 약탈하고 방화했다. 원명원은 옹정제가 황자시절 강희제로부터 하사받은 폐원에 정원을 조성한 곳으로 건륭연간에는 장춘원과 기춘원으로 증축되었고 원명원은 이 세 정원의 총칭이었다. 건륭 이후의 황제는 자금성을 공식장소로 하고 원명원은 사생활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한 곳으로 이곳에는 황제의 수집품이 소장되어 있어서 영불연합군은 이 원명원을 철저히 약탈하고 한 가지도 남기지 않았으며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두들겨 부수었고 나머지는 불태워서 약탈의 자취를 없앴다.

이 전쟁의 대가로 청국은 영불 양국에 각각 배상금 800만 냥을 지불했고 4개국 공사관 개설에 대비해 1861년 총리각국시무아문을 북경에 설치했다. 러시아는 미국과 함께 영불 원정군에 편승해 1858년 6월13일 거의 같은 내용의 천진조약을 맺고 길림성의 관할이던 흑룡강 좌안의 땅을 러시아령으로 만들었다.

원래는 청국과 공동 관리하기로 했던 우수리강 우안의 넓은 땅도 러시아령으로 편입해버렸다. 해삼위라고 불리는 이 고장은 러시아 사람들을 이민시키고 ‘동방의 지배자’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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