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아편전쟁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8/12 [19:01]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8/12 [19:01]
제1차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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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1840년 영국의 퍼머스턴 외무부 장관은 영국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중국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이유로 출병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아편을 들여오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기만 하면 중국 광주에 머물면서 안전하게 영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정군 총사령관에는 해군대장 조지 엘리엇이 임명되었고 실론주재의 아일랜드 제18연대, 캘커타의 윌리엄 포트에 주둔한 보병 26연대, 뱅골 공병 2개 중대. 마드라스 포병 2개 중대등 육군병력 4천명에 동원령을 내렸고 인도의 동양함대, 동인도회사의 무장선, 케이프타운의 함대 등이 동원되었다.

영국국민의 아편이 몰수된 곳이나 해상으로 쫓겨난 곳이 모두 광동인데도 싱가포르를 출발한 영국함대는 광동을 그대로 지나쳐 주산열도를 공격해 점령하고 다시 북상을 계속해 천진으로 향했다. 영국함대가 천진 앞바다에 나타나자 청국정부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천진과 북경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조정은 직례총독인 임칙서로 하여금 영국측과 교섭을 하도록 했는데 북경에 있던 도광제는 영국이 홍콩 등의 할양이 조약에 명시되어있는 것을 보고 받고 노발대발하여 교섭이 중지되었다.

청국과의 교섭이 중지되자 영국함대는 광주로 진격하여 1841년 5월 24일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날 광주에 상륙하여 광주성을 포위했다. 주민들이 대항하여 저항했지만 광주의 수뇌부들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전쟁을 포기학소 광동화약을 맺기로 합의 했다.
광동화약을 맺은 영국군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으로 향했다. 진강의 수비군은 전원이 옥사할 만큼 격렬히 저항했지만 영국군을 막지 못했고 진강을 점령한 영국군은 남경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남경은 풍전등화와도 같았고 영국함대를 막기 위한 전비는 바닥이 나 더 이상 싸우면 국가재정이 파탄이 날 지경이어서 마침내 도광제는 굴복하기로 결심하고 1842년 8월 29일 남경에 정박한 영국군함 콘위리스호에서 남경조약을 체결하여 제1차 아편전쟁은 막이 내렸다.
* 양국은 평화, 친목을 유지하며 상호간 재산·생명의 보호를 받는다.
*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는 대등한 자격으로 교섭을 한다.
*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다.
* 개항장에 영국인 가족의 거주를 허가하고,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조계를 허용한다.) 
   전비배상금(戰費賠償金)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은 양국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이 남경조약으로 인해 홍콩을 1997년 돌려받을 때까지 할양하고, 중국은 문호(門戶)를 강제로 개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톈진, 상하이에 조계를 허용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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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 12/06/19 [12:12] 수정 삭제  
  당황한 조정은 직례총독인 임칙서로 하여금 영국측과 교섭을 하도록 했는데 여기서 임칙서가 아니고 기선이라는 관리입니다. 베끼려면 잘 좀 베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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