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서구 유럽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의 판매와 원료를 찾아 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열강들은 식민지 개척에 성공하여 원료를 확보함과 동시에 생산된 물품을 판매하는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보다 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진 일본과 러시아는 그들이 차지하고 남은 땅인 동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동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군대를 운반하기 위해서 부동항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유럽 특히 영국의 세력이 밀려 부동항을 얻는 일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톡을 항구로 개발하는 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톡을 항구로 개발하기는 했지만 유럽쪽에 속해있는 러시아의 수도에서 동방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톡과의 거리가 엄청나게 멀어서 그곳까지 군대를 보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시베리아 황단철도였다. 시베리아 황단철도만 완성되면 빠른 속도로 병력을 수송할 수 있고 그 병력을 이용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즈음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고 조선을 완벽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청국과 러시아와의 일전을 치러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때에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일본이 조선에 개입할 명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고 이로 인해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하관조약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고 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 등을 명시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일본은 만주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조선의 지배를 기정사실화했으며 청국에서 얻어낸 배상금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런 일본의 행동에 러시아가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청일전쟁 초기에는 관망자세를 보였지만 전쟁이 만주로 확대되자 일본의 목표가 러시아의 시베리아황단철도에 있음을 깨닫고 하관조약에 요동반도의 할양이 명시되어 있는 것을 알고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을 막았다. 일본으로서는 억울했지만 이들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아직은 없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으로서의 당면과제는 조선 문제의 처리였고 러시아는 다음문제였다. 청일전쟁 직후여서 러시아를 상대할 수 없었기에 러시아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을 상대하여 조선과 러시아의 연결고리를 끊는 방법을 택했다.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군인 출신인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여 황후를 처리하도록 했다. 미우라의 주도아래 황후를 살해하는데 성공일본은 이제 러시아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을 뿐이었다. 러시아마저 꺾는다면 조선의 지배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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