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것들끼리 서로 끌어당긴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의 뿌리다.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 체험 속으로 그 대상의 본질을 끌어 당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면 자신 안에 ‘생각 진동’이 활성화되고 오래 계속될수록 그 대상의 진동이 내 안에 더 활성화된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험은 내가 생각으로 내보내고 있는 나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한 지인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환자로 오셨다. 간암 말기를 선고받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사모님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평소 간이 안 좋았던 남편에게 채식을 철저히 권하면서 잘 관리 안하면 당신은 죽는다고 무던히도 싸웠다. 남편의 죽음과 상실의 공포와 싸우면서 사모님은 남편의 잘 관리되어지지 않는 것 같은 간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졌다.
상실에 따른 심리적 공황 상태를 방어하고자 ‘죽으면 천국’이라는 신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나 심부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 ‘내가 남편처럼 간, 담낭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것인가?’ ‘나마저 죽는다면 애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생각 진동’에 계속 주의를 기울였다. 의사들의 방어진료 형태인 ‘죽을수도 있다는 말’은 사모님에게 공포를 심어 남편의 잘못된 생활 섭생을 바로 잡는 질병 확대의 중지 및 예방적 기능도 하였지만 지나친 공포 집착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지 2년만에 사모님은 자신의 담낭이 너무 크고 담석이 많이 있으니 담낭을 절제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도 남편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심한 공포감이 밀려 왔다. 남편의 죽음은 아름다웠다. 유럽 각지에서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하는 것에 안도를 얻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면서 ‘마지막 죽음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는 자기 혹사, 자기 소모적인 삶도 불사하기로 작정했다. 자신의 외로움과 결핍을 방어하고자 남편의 삶을 자신에게 투영하여 끌어 왔다. 자신이 진짜로 소망하는 것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지만, ‘생각 진동’은 남편을 추억하며 남편의 간암과 삶의 고뇌도 함께 끌고 왔다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마지막 죽음은 남편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면서 그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고 권면한다. 아름다운 죽음을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그 말 속에 남편의 죽음을 못 받아들여 치열하게 저항하며 자신을 혹사하고 있는 모습도 보여 안타까웠다.
■ 풍요는 견디는게 아니라 허용하는 것이다.
견디는 사람들은 몇가지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축복의 삶이 나에게 온다’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들을 충분히 열심히 밀어 낸다면, 그것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나는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타인들 역시 올바르게 살도록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내가 옳다고 느끼는 방식데로 타인들도 옳은 삶의 방식이 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행위를 자신의 입맛데로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기분이 좋아지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려 버린다. 하지만 강제나 위협으로 타인을 통제하려 할 때 그들에게 주의 집중하는 ‘생각 진동’으로 자신의 입맛데로 움직이지 않는 더 많은 그들과 유사한 사람들을 자신의 체험 속으로 끌어오게 된다. 자신이 원치 않는 것들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통해서는 원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다. 죄의식, 수치심을 제거하고자 원치 않는 행동을 통제하려하면 할수록 더욱 죄의식과 수치심을 더 많이 느끼는 일들을 끌어 당기게 된다. 어쩌면 ‘의인, 착한 사람이 더 많은 고난을 겪는다’는 속설은 신의 계획하심이나 사명 때문이 아니라 본래 의인, 착한 사람들의 성향이 자신이 원치 않는 행동을 통제하고 견디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철저히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에서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 이르고자 애쓰는 것과 ‘원하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상태에 이르고자 애쓰는 것의 차이를 분별하라. 그리고 ‘원하는 것’을 허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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