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도 동요되지 않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감정의 자유란 과연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일어나는 모든 인식과 결과에 상관없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휴식과 평화는 진정 이 생을 끝나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혹자는 이러한 경지는 예수나 부처 같은 의식지수가 높은 이들이나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러한 경지는 범인으로써는 도저히 도달 불가라 할지라도 필자는 내면의 ‘성장’과 ‘탐험’이라는 멋진 화두와 즐거움을 결코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 자유와 초연함
인생의 진정한 자유와 초연함은 순전히 나의 선택에서 온다. 우리에게는 무엇이든 갖기로, 되기로, 하기로 선택할 자유 혹은 그 어떤 것도 갖기 않기로, 되지 않기로, 하지 않기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 자유로운 상태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로부터 더 이상 방해받지 않을 때의 자연스러운 존재 상태다. 자유는 이미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라는 뚜껑 아래에 존재한다.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면 자유와 초연함이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감정은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다.
■ 감정은 흘려보낼 때 통제된다.
한번은 필자의 딸이 머리카락에 붙은 껌딱지를 떼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자면서 붙은 껌이 머리카락에 엉겨 붙어서 어디서부터 떼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껌이 붙자마자 발견했더라면 껌을 머리카락에서 떼어내기가 한결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는 내내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머리카락이 껌을 짓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상황은 꼬이게 되었다. 분리하기가 힘들어지고 머리카락과 껌은 이미 한 몸이 된 듯이 보였다. 결국 껌을 머리카락에서 분리하기를 포기하고 가위를 가지고 머리카락을 자르게 된다. 그러나 껌과 동시에 머리카락도 잘라내는 것은 좌우 균형도 안 맞는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이라는 부작용의 위험도 떠 안게 만들었다.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도 머리카락에 붙은 껌딱지와 같다. 내 마음에 붙어진 감정은 잘 처리되지 않으면 감정은 집착이 되고 집착은 마침내 마음과 몸의 파멸을 낳게 한다. 나중에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머리카락을 가위로 통째로 잘라내는 무식한 방법 외에도 껌딱지를 머리카락에서 떼어내는 손 쉬운 방법이 있었다. 식용유와 마요네즈를 껌이 붙은 머리카락에 붓고 머리카락에 충분히 흘려보낸 후 빗으로 빗으며 껌을 벗겨내는 것이다. 무의식으로 밀어 넣은 오래 묵은 감정이던지 순간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이던지 일단 내 마음에 붙은 껌딱지 감정은 ‘의식적인 흘려보내기’를 하는 것이 좋다. 감정은 통제하려면 할수록 오히려 머리카락과 껌이 서로 뒤엉켜 꼬이듯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 감정 흘려보내기 방법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흘려보내기의 첫 단계다. 대화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상대방이 공감을 해주길 바래서이다. 그런데 아무런 위안도 없이 계속 반복적으로 같은 문제를 나눌 때는 문제가 된다. 이럴 때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길 원하는 마음을 흘려보낼 수 있을까?’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흘려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 문제를 계속 갖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마음의 저항감을 흘려보내보라. 놓아주면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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