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간시흥
교정재생한의원장.
한의학박사 오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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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나는 나지, 내 안의 나란 대체 뭐란 말인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하지, 왜 굳이 내 안의 나와 행복하기란 표현을 쓸까?’라고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다. 사랑에 빠지면 흔히들 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사랑하는 두 사람은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더 이상의 외로움도 공허함도 없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어디 그것이 사실인가? 왜 현실은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그것은 내 안에 살고 있는 나, 즉 내면 아이와의 유대감이 잘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내면 아이가 상처받은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정작 그 사람이 아닌 상대속에 투사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
■ 내면아이와 대화하기
내면아이와의 대화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때쯤이면 불행의 원인은 타인이나 환경 같은 외부가 아닌 내면아이가 느끼는 현실감, 즉 내면에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내면아이는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의 기억이다. 모태에서부터 유아기, 청소년기 전 과정을 통해 부모로부터 보살핌이 부족했거나 신체적, 감정적, 성적, 영적인 학대를 경험한 사람은 부모와 적절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했다. 경험의 결핍과 의미 해석의 왜곡은 내면아이와 유대감을 맺는 법도 서투르게 한다. 그럴지라도 현재의 나는 내면아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부모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에게 다시 부모가 되어줌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고 잊을 수 있다. 가슴 깊이 쌓인 오래된 고통과 수치심, 억울함, 분노를 살펴보려 마음을 여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이 된다. 과거에 부모가 우리를 어떤 식으로 대했든,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우리가 내면아이에게 어떻게 대했든 내면아이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부모는 성인자아,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나 대신 누군가가 내면아이의 부모 역할을 맡아주길 바란다.
애인, 배우자, 선생님, 선배, 영적멘토, 심리전문가 등이 일시적인 부모 역할을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타인과의 의존적인 관계는 결국 또 다른 왜곡과 부작용을 낳게 한다. 근본적이고 지속적으로 내면아이를 사랑해주고 소중히 여겨주는 기술을 습득하고 적용하는 것은 내안의 나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 시선부터 바꾸자
권위주의적인 부모의 모습을 경험했을 때는 성인자아도 내면아이를 비난하고 수치스러워하고, 통제하며 폄하한다. 이 경우 두려운 마음이 들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 있지? 난 항상 일을 망쳐버린다니까. 나는 무능하고 가치가 없어.’ 반면 너무 자녀를 방치하거나 허용적인 부모를 학습했을때는 두려운 마음이 들면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다른 감정으로 회피하며 무책임한 경향이 있다.
‘기분이 상하니까 술이나 한 잔 더 마셔야겠어.’ ‘이 일은 하고 싶지 않아. 포기해야겠어.’ 때로는 내면아이가 기분 내키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신체적 위해를 가하도록 그냥 내버려두기도 한다. 이내 자신의 감정과는 단절되고 거부감, 버림당한 기분이 든다.
자신이 약하고 어설프며 매력도, 재능도, 똑똑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부드럽게 바꾸어야 내면아이와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내면의 공허감이 채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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