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는 리스트와 바그너, 두 거물의 신낭만주의가 전 유럽을 뒤덮고 있을 때 세상에 태어나 그들과 대결하면서 슈만의 중기 낭만주의와 베토벤의 고전양식,더욱이 거슬러 올라가 바하의 바로크양식까지 가미한 작품을 썼다.
온 세상 음악가들이 미래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던 때 브람스는 홀로 옛것을 찾아 뒤로 갔던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그의 강한 자주성과 ‘청개구리’식 의 반항성에도 기인했겠지만, 소년시절의 스승 마르크스센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낭만주의를 반대했던 마르크스센은 젊은 브람스에게 바하와 베트벤만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브람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데는 선배인 슈만과 음악평론가인 한슬리크의 힘이 컷다. 브람스는 그들과 오래도록 두터운 교분을 맺었으며, 특히 슈만이 죽은 뒤 유가족을 지키는 일에 헌신적인 노력을 바쳤다. 브람스가 일생을 독신으로 마친 이유로서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와의 관계가 운위되기도 하지만 그는 어떤 선을 넘을 정도로 부도덕한 사나이는 아니었다.
청년 시절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의 레메니라는 바이올리스트와 알게 되어 함께 연주 여행을 했다. 또 당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압정을 피해 함부르크로 흘러 들어온 헝가리 난민들로부터 헝가리 민속음악에 대한 지식을 흡수했다.
이러한 경험과 지식은 뒷날 그가 헝가리 무곡등을 쓰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브람스는 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갔던 것과 같은 간장암으로 64세에 생애를 비인에서 마감했다.
브람스는 자기 기분을 가식 없이 그대로 입 밖에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이 지나쳐 상대방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한번도 결혼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던 브람스에게 그이유를 물으면 ‘기회’가 없어서 라고 간단히 대답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결혼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연애는 몇 번인가 한 경험이 있었다.
특히 괴팅겐대학 교수의 딸 아가테 폰 지보르트라는 여성과는 약혼까지 했는데 그만 파혼하고 말았다. “.......사랑하오. 만나고 싶소. 그러나 나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은 참을 수 없소....” 어느 여성이 이런 연애편지를 받고 돌아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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