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년차 이호국(36세, 좌))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웹프로그래머로 5년 동안 일했다.
나름 생활에 불편은 없었지만, 과장이라는 직급을 달면서 왠지 모르게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웹프로그래머의 일이란 개발자 이상이 되지 않는 한 40대 이후의 직장생활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과감히 2006년 12월 퇴사했다. 직장을 구해놓고 그만둬야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28개월 된 아들과 10개월 된 딸을 보면서 앞이 막막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장사를 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마음잡고 새 일을 구상하기까지는 7~8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출산과 육아에 시달리던 아내는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자신의 생각을 대화로 늘 설명해 왔던 터라 잘 견뎌주었다.
누군가로 부터 전문기술자가 되면 외국으로 이민가기가 용이하다는 말을 듣고 전문기술자가 되려는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일은 용접보조공이었다. 하지만 빠듯한 월급과 열악한 작업환경이 늘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래도 9개월여 동안 참고 견뎠다. 하지만 또다시 직장을 나와야 했다. 보조공으로 일하면 메인이 될 기회가 전혀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내에게 면목 없이 또 이직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짧은 경력이 있었기에 이번엔 좀 나아졌다.
다시 지금의 직장을 선택하고 나서 그에게는 없던 꿈도 생겼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조장환(34세, 우)씨는 전공을 살려 레이저가공을 하는 업무를 해 왔다. 하지만 절단을 주로 하는 레이저가공은 여러 면에서 한계가 보였다. 제품을 완성하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 단순작업에 회의가 느껴졌다.
2007년 12월. 잘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용접을 하면 벌이가 괜찮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기본기를 배우러 용접학원 실무반에 등록했다. 수료 후 지금의 직장에 자리 잡은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웃을 수 있게 됐다.
5~6년 후면 자신의 분야에서 분명한 몫을 해내는 굵직한 기능인이 되어있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비전만 있다면 과감히 도전하라.”고 자신감을 보인다. “선입견에 흔들리지 말고 새로운 선택을 두려워 말라”고 자신처럼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단다.
실업률이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는 요즈음에 과감히 인생2막에 도전한 그들의 용기가 눈물겹다.
소위 3D업종 일지라도 그들 나름의 꿈을 가슴에 품고 오늘을 견디는 그들이 진정 챔피언이다.
박경빈기자thejug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