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人, 사람 中心, 人의 自存을 위한 삶

김창기 남광산업기계주식회사 대표이사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8/20 [14:47]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8/20 [14:47]
사람 人, 사람 中心, 人의 自存을 위한 삶
김창기 남광산업기계주식회사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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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흥 서해로타리 전 회장 김 창기 남광산업기계주식회사 대표이사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현대제철과 동부제강 등이 들어서며 철강의 메카로 떠오르는 지역이 있다. 조만간 시 승격을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충남 당진.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서울에 한번 상경 하려면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리던 그곳 당진이 고향인 김창기 남광산업기계 사장의 고향 사랑은 남다르다. 농·어촌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농촌지역이지만 이제는 고대국가공단이 조성되면서 산업인구가 늘어나 고향 발전이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창기 사장은 전통적인 농촌 출신과는 달리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서울로 유학을 갈 정도로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집안 출신이다.  이렇듯 자녀 교육에 적극적이던 집안의 영향으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청운의 꿈을 안고 도착한 서울은 낯선 곳이었기에 모범적 학교생활 보다는 스포츠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민 스포츠였던 고교야구에 흠뻑 취해 야구장을 수시로 찾게 되었고 권투선수 홍수완의 영향으로 권투 붐이 일자 권투 도장을 찾아가 한 때 권투선수를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훈련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금방 포기하고 늦은 공부에 열중하여 향토 장학금을 받으며 경영학 공부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소년 김창기 사장은 남들도 한번쯤 겪게 되는 일을 겪으며 보통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번은 집에서 보내온 등록금을 가진 채 길을 가다 마침 길가에서 야바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쉬워 보이는 게임에 참여 했다 그 돈을  몽땅 날리기도 했다는 그는 이후 모든 잡기에 무관심의 원칙으로 살아왔다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1978년 국가적으로 혼란하던 시기에 군대에 입대하여 훈련소에서 힘든 노역을 할 때가 가장 힘들기도 했으나 이후 자대 배치를 받으며 가장 혼란스럽던 시대의 군 생활이 지금까지의 가장 편했던 시절이었던 같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좀 더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것에 후회를 하기도 했으나 이후 동양제과의 영업부서에 입사하여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목표달성을 채우며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직장인으로는 힘들던 해외연수의 기회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고향 부모님께서는 수시로 맞선 자리를 주선하셨고 그럴 때마다 결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어느 추석날 이모님의 중매로 만난 지금의 부인(최현영 여사)를 만나며 하루 만에 결혼이야기가 오가고 한 달 만에 약혼과 결혼을 치루는 초스피드 결혼을 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고향의 부모님을 공경하고 남편의 일에 긍정적인 내조와 곧은 성격으로 뒷바라지 해준 아내가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3년 전 교통사고로 10개월간 입원했을 때 부인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며 같이 고생한 부인과 큰 딸(유치원 교사), 그리고 아들(현재 군 생활)을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 꼽았다.

김창기 사장의 인생이 180도 바뀐 것은 1990년 손윗동서가 운영하던 산업기계제작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다른 업종에서 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손윗동서의 끈질긴 설득 끝에 그 회사의 관리 업무를 맡게 된다.
이곳에서 30대 후반에 시작한 인생 황금기는 얼마 되지 않아 IMF라는 거대한 절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존 거래처와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 했지만 결국 이 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40초반의 젊은 김창기 사장에게는 다시 시작해야 하는 암담한 현실에 절망을 하기 보다는 기존의 직원들과 협의하여 새롭게 회사를 만들자는 각오를 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에 동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998년 남광산업기계는 시화공단에 산업기계 전문제작 회사로 탄생 하게 된다. 그러나 사업 초기 어려움은 눈물겨운 고난의 연속이었다. 기존 거래처들의 냉담함과 신규 거래처 개발의 어려움 때문에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면서도 판로가 막막해 회사 경영은 위기에 처해진다. 당시 인천에 살던 집을 처분하고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해 나가게 된다. 이때 김창기 사장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이 그동안 꾸준하게 만들어 온 인맥이었다고 한다. 주변 인맥들의 도움과 신규거래처를 꾸준히 확보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빠르게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김 사장은 무엇 보다는 중요한 것이 사람중심이라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폭 넓게 이해하며 사회 활동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현재 제철소에 필요한 제철 설비 부품, 종이를 만드는 제지 기계 그리고 콘크리트 펌프카에 들어가는 메인 부품 등의 종류를 제작하는 남광산업기계는 중국, 인도, 동남아, 중동 등에도 수출을 하고 있고 국내 2~3위의 펌프카 생산업체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제품을 제작하고 있어 생산 물량이 부족할 정도여서 현재 공장 설비를 늘려가고 있다고 밝혔다.
애향심이 강한 그는 또 충청향우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불완전한 조직이지만 3번의 수석부회장을 거치며 2005년 5대 회장을 할 때 그냥 거쳐 가는 향우회가 아닌 편안한 향우회 조성,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동네 사랑방 같은 향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 했다는 주변의 평가다. 향우회는 정치적 외풍에 휩싸이지 않아야 한다며 주변에서 정치적 야망을 꿈꾸는 것이 아니냐는 색깔로 바라보기도 했으나

자신은 그럴 뜻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개인적으로 욕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주변의 친구들이 정치를 하고 있어 자신은 정치보다는 사람 중심의 삶을 살겠다며 ‘정치 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다짐하는 그 모습에서 사람을 좋아하고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그의 내면이 느껴졌다.

정왕 2동 초대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을 4년 동안 역임하며 사회봉사의 보람을 갖게 되어 아직도 개인적으로 소년가장에게 1:1 후원을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사들이 그 결연이 단절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리를 해 줄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사람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김창기 사장에게 서해로타리 신영호 초대회장의 밤샘권유로 창립멤버가 되어 5대회장으로 활동했다는 김 사장은 당시 봉사단체로서의 즉흥적이 아닌 철저한 사전 계획에 의해 회원들의 자발적 봉사 참여를 유도하여 3690지구에서 최초로 소석 김성우 총재가 공식방문 주회를 개최하는 영광을 갖기도 했다. 클럽 발전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실 있는 내용으로 타 클럽에서 벤치마킹을 해가는 등의 성과를 올려 시흥11지역 8개 클럽 중 최우수클럽 표창을 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봉사는 단체에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봉사가 필요하다며 노령화 되는 사회에 복지와 봉사가 우리의 미래를 밝힐 수 있다고 말하는 김창기 사장은 사람 人, 사람 中心, 人의 自存을 위한 삶을 사는 아름다운 기업가로  기억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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