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11/03 [11:05]
수성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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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은 애증이 얽힌 관계였다. 그러나 권력의 비정함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를 내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져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태조는 정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어린 두 아들과 사위를 위한 불사를 자주 일으켰고 이를 핑계로 도성을 떠나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1402년(태종 2) 10월 9일 회암사에 은거하며 기회를 엿보던 태조는 동북면으로의 행차를 감행했다. 태조의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명의 사신을 배웅하고 동북면에 있는 선조의 능을 참배한다는 명목을 가지고 있었으나 내적으로는 상당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동북면에는 태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는 세력이 여전히 건재했기에 태조의 동북면 행차는 태종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11월 5일 안변부사 조사의 등이 거병했다. 이때의 사건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의 둘째부인인 강씨의 원수를 갚고자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다.”고 했다.

조사의가 난을 일으킨 안변은 강씨부인의 모친 묘가 있는 곳으로 일찍이 그곳의 부사로 강씨부인과 인척관계에 있는 조사의를 임명했었다.
공교롭게도 태조가 동북면으로 가있던 시기에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누가보더라도 배후에 태조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난이 발발한 뒤 며칠이 지나도록 태종은 쉽사리 진압군을 파견할수 없었다. 반란의 중심에 태조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동복면에 사람을 보내 교서를 반포하고 동정을 살피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파견된 자들은 붙잡혀 있다가 간신히 도망쳐오거나 아니면 피살되었다.

11월 12일 더 이상 파병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태종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관군을 파견했다. 그런데 맹주로 파견한 이천우의 부대가 맹주 초입에서 조사의의 군대에 패배하여 포위되고 말았다. 이천우는 조선 초기 손꼽히는 핵심무장 가운데 한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태종은 부왕을 끼고 있는 반군의 사기를 압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임을 깨달아 직접 반군 진압에 나선다.
이거이, 조영무, 이숙번, 민무질 등 홍건적과 왜구와의 실전을 통해 정예화 된 태종의 측근들은 태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11월 27일 안주에서 조사의의 군대를 패퇴시켰고 위축된 반군은 한밤중에 살수(청천강)를 건너 철수하려다 수백 명이 물에 빠져 죽는 불운이 겹쳐 거의 궤멸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조사의 등 잔여병력은 안변으로 돌아가던 중 관군에게 사로잡히고 12월 9일 태조가 환궁하여 실질적인 연금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이 난은 끝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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