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10/19 [14:23]
늠내길에서 자연을 만나고, 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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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보면 가끔 사는 게 전쟁 같은 생각이 든다.
‘단 하루만이라도 일상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은 늠내길 개장 소식을 접하며 한껏 고조되었다.
어제까지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산더미 같은 일들은 과감히 내려놓고 오늘 만큼은 홀가분히 자연인으로 돌아가 마음껏 자유로우리라 기대하며, 숲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길고 느슨한 길 위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삼삼오오 짝지어 숲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모습은 마치 한 무리의 오색 띠처럼 예쁘게 보였다.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을 자연스럽게 이어놓은 늠내길을 만들기위해 누군가는 우거진 잡풀을 헤치며 작은 길을 내었을 터이다.
이 길은 어떤 길일까, 앞으로 어떤 숲을 지나게 될까하는 기대감이 등에 맨 배낭만큼 부푼다.
야트막한 산봉우리를 넘고 구불구불 완만한 곡선의 능선도 넘으며, 때로 웃고, 떠들며 기분 좋게 땀도 닦았다.
처음 만나는 이들과 간식도 나누며, 숨도 고르고, 들릴 듯 말 듯 콧노래도 흘리며 ‘요정도 쯤이야 거뜬하지’하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시청을 출발해 작고개를 넘는 2km정도의 거리까지만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군자봉을 오르며 서서히 체력의 한계를 실감하는가 싶더니, 가래골 약수터에 앉아 이른 점심을 먹고 나서 부터는 짧은 오르막도 힘에 겨워지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 운동을 좀 해놓는 건데’ 후회가 마음에 무거운 추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일행들에게 민폐를 주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자존심만은 지키리라 다짐했다. 이제 겨우 3분의 1 왔다. 슬슬 얼굴표정이 굳어진다.
진덕사에서 잠시 쉬며, 계속 가야할지 잠시 갈등했다.
5.5km를 왔으니 절반의성공이다. 그만 갈까 하는 생각이 자꾸 발치에 걸렸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거기다 남은 길이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호기심이 계속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래, 끝까지 가보는 거야, 힘들면 좀 천천히 가고, 쉬었다 가면 오늘 안에는 도착하겠지’ 편하게 마음먹었다. 완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없던 힘도 불끈 생기는 듯 했다.
몇 걸음 오르막길을 걷다가 멈추고, 또 몇 걸음 걷다 멈추기를 수차례. 가래울마을을 지나 잣나무 숲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왔다.
이미 옷은 땀에 젖어 무겁고 무릎은 뻐근하게 아파오고 있던 차에 바람은 마치 위로라도 하려는 듯 ‘조금만 더 가면 돼’라고 힘을 불어넣는 것만 같았다.
언덕에서 바람을 맞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내가 넘어온 산등성이와 길들이 눈 아래 펼쳐져있다. 뒤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다는 대견함 마저 든다.
수압봉은 길고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할 만큼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오죽했으면 ‘수압봉’이라는 이름조차도 맘에 들지 않았다.
사티골 고개를 넘으며,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나뭇가지에 메어진 파랑과주황색 표식 띠를 발견하고는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갈림길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가느다란 희망처럼 눈길을 잡아끌며 행선지를 가르쳐 주곤 하던 늠내길 표식 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마치 “힘내세요” 속삭이는 듯 했다.
이미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겨우 정신 차려 길을 재촉하는 형편의 나에게 숲은 “잘하고 있어, 조금만 힘을 내”하며 살그머니 미소 지었다.
오르막보다 조심해야 할 것은 내리막길. 몇 번이나 내리막길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미끄러질 뻔 했다.
드디어 선사유적공원이 보였다. “다 왔다!”는 생각이 들자 피곤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마지막 힘을 내서 남은 길을 걸었다.
장현천 길은 그야말로 늠내길의 보너스였다. 허리만큼 오는 잡풀들 사이를 헤집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마법의 길이 생겨났다.
둑길 위를 따라 서있는 갈대들은 온몸을 흔들며 좋아라 한다. 물길을 내려다보며 피어난 노란 호박꽃들이 까르르 웃어대고, 지금은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풀들과 익숙한 두엄냄새와 맑은 시냇물.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소박한 밭에는 배추랑 무, 시금치, 파, 그리고 등이 굽은 늙은 할아버지와 누렁이. 흑백사진처럼 옛 모습의 풍경들이 그림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디선가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늠내길 완주다. 난생처음 맛보는 편안한 자유가 거기 ‘늠내길’에 있다.


 

박경빈 기자 thejugan@ham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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