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10/13 [11:58]
비운의 왕 정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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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정종은 1357년(공민왕 6)에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여 17세부터 이성계를 따라다니며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재빨리 평양을 빠져나와 부친의 진영에 합류함에 따라 회군의 성공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이방원과 더불어 가장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개국공신의 반열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병권도 부왕의 묵인 하에 정도전 등의 문신세력에게 빼앗기고 오히려 사병을 소유하고 있던 무신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심한 견제를 받았다.

그러던 중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 왕자의 난에서 세자였던 방석이 죽음으로써 차기 세자 자리는 초미의 관심사로 누가 보더라도 이번 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방원이 차지 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는 “모든 일의 원인이 서자를 세운데 있으니 마땅히 장자를 세워야 한다”라는 명분아래 영안군 방과를 세자로 책봉했다.

태조는 아직도 자신을 추종하는 거대한 세력이 있기에 방원이 아닌 방과를 세자로 세울 수 있었고 방원은 자신이 왕자의 난의 주모자이기는 했지만 대놓고 세자자리를 탐하기에는 아직 넘어야할 산이 많았기에 형인 방과의 세자책봉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방과가 세자에 책봉됨으로써 상황이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불씨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에 조선 초기의 정국은 다시금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398년 9월 정종은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이 된 후 그는 적극적으로 정사에 임했다. 그러나 왕비인 정안왕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던 그에게 후계자 자리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그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방원과 방간은 경쟁관계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갈등이 마침내 폭발하게 된 사건이 바로 ‘제2차 왕자의 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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