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9/19 [17:07]
정도전과 이성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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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조선 초기의 권력투쟁은 정도전과 하륜에 의해서 일어났다. 정도전과 하륜은 역성혁명 과정에서 핵심참모로 일했지만 수성과정에서 뜻을 달리하는 바람에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다.
 
정도전은 신권강화를 도모했고 하륜은 왕권을 강화하는 편에 섰다.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하륜은 태조는 나라를 세우는데 그 역할이 끝나야하며 어렵게 세운 나라를 수성하는 데는 이방원과 같은 인물이 낫다고 판단하여 이방원 편으로 돌아섰다.
 
정도전은 국가가 신하들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전제정치를 혐오하여 일찍이 자신과 뜻을 같이할 인물을 물색하던 중 이성계를 만났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고 정도전도 이성계가 있었기에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돈독한 관계는 세자책봉에 반영됐다. 태조 7년 하륜을 충청도 관찰사라는 외직으로 쫓아 보낸 후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태조는 본부인인 한씨부인과의 사이에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둘째부인인 강씨와의 사이에 방번과 방석을 두었는데 이중에 나이가 제일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이었다.
 
신권중심의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는 나이가 어린 방석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태에 가장 불만을 품은이가 바로 방원이었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하던 ‘재상중심정치’와 ‘세자책봉’에 대해 “이씨가 세운 나라를 정씨가 말아먹는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이방원의 뒤에는 하륜이 있었다. 하륜은 일찍이 이방원의 관상을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예지했으며 이성계는 창업으로 끝나야하며 수성으로 적합한 인물로 방원을 꼽았다. 허약한 군주보다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사람만이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신하도 왕을 도와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있던 하륜은 몰래 한양으로 올라와 제1차 왕자의 난을 진두지휘했다. 태조 7년(1398) 7월 안산군수 이숙번을 불러들여 군사를 모아 방석과 방번 형제들을 살해했고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정도전이 죽은 뒤 그의 사상은 잊혀지는듯했으나 자신의 정적인 이방원에 의해 재상중심체제를 제외한 나머지 논리들인 억불숭유정책이라든지 사병혁파를 통한 중앙화된 군사조직의 완성 등이 받아들여져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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