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18/11/0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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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에 대한 고찰 백남준 그는 한국에서 미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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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1984년 그는 갑자기 한국에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백남준 스스로도 나는 세계(世界)적인 예술가가 아니고 세기(世紀)적인 예술가다.”라고 표현했듯이 사람들은 공공연히 한국 현대 예술가 중에 백남준의 명성을 넘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백남준이 남긴 알 듯 말 듯 한 어록들이 내게 꽤 인상적으로 남는 이유는 백남준 방식의 언어유희겠지만, 그 말이 지니는 통찰력과 그만의 예술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있음이고, 그 때문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예컨대 작품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예술의 의미를 모르는 상당히 많은 대중들의 눈에는 제 아무리 희소성 있고 값비싼 유명 화백의 그림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다수 대중에게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것에 영감을 불어넣고, 평범한 대중의 무딘 감각에 고매한 감정을 덧씌워 열광하게 한다는 것은 분명 백남준의 말대로 사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백남준은 얼마나 뛰어난가?

나는 백남준을 떠올리면 두 가지 수식어 딸린 단어가 동시에 어느 것이 먼저랄 것 없이 떠오른다.

위대한 천재, 친일파 2그리고는 그가 살아오면서 느꼈을 정체성과,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반항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그가 천재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흔적이나 업적들은 굳이 애써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기행에 가까운 도발적 행위들과, 삶의 궤적들과, 기록적인 작품들과, 권위있는 예술상 수상경력들이 말해준다. 그가 탄생시킨 비디오 아트는 마치 미술계가 물감을 꼴라쥬로 대체해 예술표현에 있어 엄청나게 다양한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캔버스를 비디오·텔레비젼·컴퓨터 모니터 같은 전자 매체로 대체한 백남준의 작품들 또한 엄청난 무형의 가치를 부여해 현대미술의 지형을 바꿔 놓으며, 또 다른 어떤 예술의 형태로 확장될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     © 주간시흥

 

그의 천재적 재능은 다양한 방식의 설치작품들과 전위적 요소들을 떠나서 비디오 매체의 기술적 부분만으로 표현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하나만 보더라도 감탄을 넘어서 찬사를 요구하기에 충분하다.

독자들도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작품은 현대적 고전소설 분류에 들어갈 만큼 너무나도 유명한 조지오웰의 예언적 성격을 가진 소설 이다. 1984속 대중매체에 인간이 지배당하며 살게 되리라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예측을 198411일 정오에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 쇼로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에 동시다발적으로 송출 해 인공위성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은 대작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단순히 인공위성에 다원생중계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1시간에 가까운 풀 버전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내용적 측면에서는 영미문학계의 대가인 조지 오웰을 향해 1984년도에만 가능한 위트 넘치는 타이밍으로 당신이 예측한 미래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조롱했다. 뿐만 아니라 기술적 측면에서는 뉴욕의 아방가르드 행위예술가인 로리 앤더슨이나, 프랑스 배우 이브몽땅, 앨런 긴즈버그, 백남준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자 전위 음악가인 존 케이지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로 즐거움과 함께 다양한 추상적 형태 모니터 속 패턴들을 결합시켜 아무도 넘보지 못할 그만의 독보적 예술세계 속에서 현대과학의 선구적 경이로움까지 함께 선보였다.

백남준은 국·내외 근·현대사를 통틀어 미술사에 얼마나 천재적 인물로 기록되든, 플렉서스 전개운동을 함에 있어 얼마나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든, 특이한 행위예술로 세간에 얼마나 회자되었든, 1970년대 중반부터는 몇몇 방송사들과 협력해 비디오 아트를 TV로 송출해 이미 무시할 수 없는 네임 벨류를 얻고 있었지만 1984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전에 한국에 그의 존재는 없었다. 아니 없었다기 보다 알았다 해도 애써 지우고 싶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제아무리 명성 있는 세기의 인물이더라도 1984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갑자기 한국에 나타나 친일파 2세라는 가족내력이 낱낱이 해부되고, 천재성이 희석되고, 그런 과정에서 연좌제가 있다면 마땅히 한국에서만큼은 그의 이름이 위대한 예술인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없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제 한국에서 그의 위치는 세계적인 예술가라며 그를 위한 추모나 업적을 기리는 거대한 행사를 공공연하게 하지는 않아도, 친일파 출신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는 거의 사라진 듯 하고 대신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라는 자부심으로 어느정도 자리잡아 가는 모양새다.

실제 한 인간으로서 개인 백남준으로 보면 그는 당대 최고의 재력가에서 1932년도에 태어났으니 청년기에 민족의 반역자가 된 입장에서 몰락을 경험하고, 고국을 완전히 등지는 삶을 경험한 셈이다. 그리고 성공 후 고국에 돌아왔을 때 짖밟힌 천재성 안에서 친일내력을 인정했고, 나름대로 한국 문화예술에 기여하고자 하는 여러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백남준 고찰이라는 글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와 천재성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 가족의 력을 성토하고자 이글을 쓰지 않았다. 다만 나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의 내력에 대한 반감과, 천재성에 대한 존경의 양가감정에 휩쓸려 작품을 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하면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그런 이유로 백남준이 청년기 중년기를 거쳐 정체성 모호한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을 갈등과 고뇌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내게는 백남준이 초창기 파괴적 행위예술 과정에 플렉서스 핵심인물로 활동했던 것이 너무 지당하고, 존 케이지, 로리 앤더슨 같은 전위적 인물들에게 끌림이 너무 자연스럽고, 글의 서두에 언급한 그의 어록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이 지나치게 가슴에 와 닿는다.

: 주간시흥 추연순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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