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6/15 [15:1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6/15 [15:17]
삼별초의 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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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가 일으킨 무인난은 단지 정치적 쿠테타만은 아니어서 이 사건은 고려왕조의 정치적인 운영방식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고려사회는 이미 중앙정부에서 시작된 모순과 갈등을 조절하는데 한계를 보였고 그 결과가 정중부의 무인난이었다. 이 정치적 파탄의 결과는 커서 한사람의 무인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정중부가 죽고 경대승과 이의민을 거쳐 새롭게 권력을 잡은 최충헌시대에 이르러서는 역사상 최초로 무신에 의한 독재정권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 고려왕조도 20대 신종에서 23대 고종으로 바뀌었다.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든 고종 시대는 몽고가 융성한 시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서쪽으로 밀려났던 거란이 다시 동으로 쫓겨났으며 남으로 밀려났던 송나라가 망국에 직면하고 북쪽의 맹주로 자리 잡았던 금나라도 몰락하고 말았다.
 
몽고의 이같은 무서운 팽창정책에 맞서 고려는 수십년 동안 영토수호전쟁을 수행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무신정권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왕실은 무신들의 암투를 이용하여 왕권을 회복하려 했다.

금나라 말기에 중국 동북지방은 원래 여진족의 출신지였는데도 거란의 야율유가가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금나라 장군 포선만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립한 후 스스로를 대진국왕이라 칭했다.

야율유가는 멸망한 거란족 왕조의 재건자임을 자초하여 국호를 요로 정하고 몽고에 원군을 청해 금의 토벌군과 싸웠지만 그 와중에 요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야율유가는 어이없게도 추방되고 말았다.

추방된 야율유가는 징기스칸의 후원으로 몽고군의 지원을 받아 위요를 공격하자 위요는 패주해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영토로 들어와 사방을 노략질하며 초토화시켰다. 위요는 거란족 군단으로 단적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고려는 국내에서 약탈과 살인, 방화를 자행하는 단적을 포선만노와 야율유가의 도움을 받아 진압하고 이때부터 고려는 매년 몽고에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러다 징기스칸이 서정으로 인해 몽고군이 철수하자 포선만노는 이때를 기회로 삼아 몽고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그 사실을 고려에 통보했다. 이 때문에 고려는 몽고와 포선만노의 틈바구니에 끼어 혹독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몽고가 요구하는 공물은 말이 공물이지 착취나 다름없는 막대한 양이어서 고려의 재정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고려가 요나라나 금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대에는 공물을 바치면 그 이상의 보답이 있어서 이를 조공무역이라고 하여 고려로서는 수지맞는 장사였지만 몽고의 경우는 주는 것 없이 빼앗아만 가는 것이었다.

고려가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한 것은 징기스칸 13년(1218)으로 그해는 군량이 1천석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듬해부터는 고려에서 산출되는 토산품으로 바뀌어 몽고가 요구하는 공물 중에는 금, 은, 비단, 수달가죽 등을 포함해 희귀하고 귀중한 것이 많았으며 그 수량이 막대했다.

그러던 중 고려에서 거두어들인 공물을 가지고 귀국하던 몽고의 저고여 일행이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1224년에 일어나 그 이후로 몽고와 고려는 절교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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