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17/02/09 [13:53]
한국근대사 - 갑신정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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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자이며 역사학자였던 전 서울대 교수 신용하씨는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청군의 불법 궁궐침범과 군사적 공격으로 청군은 조선 국왕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채 궁궐 안으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여 정변을 무력으로 붕괴시켰다.

 

둘째, 개화파의 일본군 차병과 일본군의 철병이었다. 개화파는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에 대한 견제력으로 사용하려고 고종의 친필 명령서까지 받아 일본군을 합법적으로 차병했으나 일본군은 결정적인 순간에 싸우지 않고 철병해버림으로써 정변을 붕괴시키는데 크게 작용했다.

 

셋째, 민중의지지 결여이다. 만일 민중의 지지만 있었어도 청군의 군사개입을 막을 수 있었지만 민중은 시종일관 냉담했다.

 

넷째, 시민층의 사회적, 정치적 미성숙이다. 개화파의 혁신정강과 개화정책은 근대 시민적이어서 시민층이 성장해 있었으면 확고한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음에도 당시 시민층이 미성숙하여 확고한 지지층을 갖지 못했다.

 

다섯째, 개화파는 정변과정에서 민비를 철저하게 감시하지 못해 민비와 청군이 비밀리에 연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급진 개화파는 민심에 대해서도 큰 오판을 했다. 그들은 국왕의 명의로 내정개혁안을 발표하기만 하면 민중적 지지를 얻으리라는 기대를 했지만 실상은 그들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모든 일이 일본의 식민지 전략차원에서 꾸며진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변은 실패했지만 정변이 추구했던 개혁의 내용과 지향성은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나타났고 이후 각종 개혁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근대 개혁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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